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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윤치호 친일명문가와 이순신 장군 후예 독립운동 집안의 인식 차이

관리자
2023-03-20

<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말라? 개같은 인생들의 나라 >


1.  해방 후 78년이 되도록 친일파와 그 인식에 대한 청산이 과제로 남은 비극은 언제쯤 극복될 것인가.  친일파와 그들의 인식이 좀비처럼 끊임없이 재생될 때마다 국민적 각성은 높아지는 걸까? 아니면 강자로써 군림해온 그들에게 순종하며 살아가는 일에 익숙해진 현실을 다시 확인할 뿐일까? 친일파와 그 후손들은 이완용 뿐 아니라 사회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내가 사는 아산에 유명한 두 가문의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이다. 


2. "약자가 항상 순종해야만 강자에게 애호심을 불러 일으켜 평화의 기틀이 마련되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조선이 일본에게 덮어놓고 불온한 언동을 부리는 것은 이로운 일이 못된다." 3.1만세운동에 관한 윤치호의 평이다. 그리고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말라”고 적었다. 


윤치호 부친과 윤웅렬과 숙부 윤영렬은 조선말 대지주 집안이었고 이를 발판으로 윤치호를 17세인 1881년 일본 신사유람단에 포함시켰다. 윤치호는 1880년대 중반 일본과 미국에 유학하였고 그의 집안은 동학농민혁명 진압에 사병을 동원하기도 하였다. 


1895년 이후 조선에 돌아온 윤치호는 1896년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기념하기 위한 독립문 건립추진위원회에 참여하였고 이완용, 서재필에 이어 독립협회 회장이었다. 일제가 조선을 병탄할 때 받은 아버지의 귀족 작위, 남작을 물려받았으나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1912년부터 3년 동안 감옥에 있었고 일제에 전향하였다. 


이후 윤치호는 해방될 때까지 대표적인 친일파의 길을 걸었다. 일제 중추원 참의, 귀족원 의원으로 임명되었고 해방되던 해 12월 초에 죽었다. 그는 영어로 60여 년 간이나 일기를 썼다.  1890년 5월 일기에는 “조선이 지금 야만적 상태에 머무느니 차라리 문명국의 식민지가 되는 게 낫겠다”고 썼고 1893년 11월에는 “만약 내가 마음대로 내 고국을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일본을 선택할 것이다. 오, 축복받은 일본이여! 동방의 낙원이여!”라고 기록했다. 


윤치호 일가는 부친 윤웅렬 등 7명이나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될 정도로 친일명문가였다. 해방이 되고 윤치호가 죽은 이후에도 그의 일가는 떵떵거리고 살았다. 1960년 윤보선이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 그의 일가는 국회 부의장, 농림부장관, 서울대 총장, 주영공사 등을 지내고 있었다. 


아산시는 세금으로 윤보선 대통령 생가, 윤치호 일가의 터전을 근대문화마을로 조성하였다. 그러나 안내판에 민족문제연구소 등 시민단체가 제기하고 충남도의회가 의결한 친일파 가문이라는 몇 줄의 글조차 삽입하지 못하고 있다. 윤치호는 점차 애국계몽운동가로 포장되고 있고 그 일가의 위세는 여전하기 때문이다. 


3. 아산이 고향인 이순신 장군 후손 덕수 이씨 가문은 조정으로부터 위토를 받아 대대로 충무공 묘를 돌보고 사당을 모셔왔다. 조선말 일제의 국권침탈이 본격화되자 덕수 이씨 충무공파 9세손 이필희는 제천의진 의병장으로 떨쳐나섰고 10세손 이규풍과 이규갑 형제는 독립운동에 나섰다. 


이규풍은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운동을 하였고 1909년 안중근 등과 단지동맹을 결성하는 등 계속해서 투쟁하였다. 일제의 항의로 제정러시아는 1910년 말 의병세력을 체포하였고 이규풍을 비롯한 8명을 이르쿠츠크로 유배를 보냈으나 이규풍은 1911년 5월 석방되었다.  


“네가 귀신이냐, 사람이냐! 만약 귀신이라면 그 자리에 있어도 좋지만 사람이라면 냉큼 물러가라.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죽어서 돌아온다면 환영하겠지만, 살아서 어미를 만나러 오는 법이 어디 있느냐!” 석방 후 이규풍은 모친 박인라 여사를 봉양하기 위하여 아산으로 돌아왔으나 이규풍은 모친의 일갈을 듣고 바로 연해주로 돌아갔다. 


이규풍은 의병운동과, 민족유일당운동, 고려혁명당 활동을 하다가 1932년 만주에서 사망했다. 이규갑은 임시정부 의정원 충청도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그의 아내 이애라는 남편의 독립운동을 도와 임시정부 밀서를 들고 국내로 잠입하다 체포된 후 사망하였다. 


11세손 이민화는 북로군정서 군인이었고 12세손 이세영은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맡는 등 이순신 가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이는 12명으로 확인되었고 그중 독립장 6명, 애국장 2명, 애족장 2명 등 10명이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았다.(2011년 김기승의 ‘이순신 후손의 항일독립운동’)


그러나 아산에서 이순신 가문의 독립운동은 묻혀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년 성웅 이순신 축제를 성대하게 하지만 이순신의 정신을 이은 후손들의 독립운동을 조명하는 행사는 없었다. 사실 덕수 이씨 후손들도 잘 모르는 이들이 많은 듯하다. 


4. 엊그제 3.1절 행사가 열린 탑골공원에서 어떤 노인네가 “조선놈은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한국에서 보수세력이 지킨다는 전통과 민족, 나라의 가치는 무엇인가. 우리 역사에서 외국군대가 70년 이상 주둔하며 나라를 지켜준 시대가 있었는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수만 명이 숨져간 3월 1일, 2023년 3.1절에 대통령은 일제 침략에 고통받은 이유가 우리 민족 탓이라 하고 광화문에서는 보수라 자처하는 세력이 미국 국기 성조기를 흔들며 이런 대통령을 지지하고 한미동맹 강화를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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